#26 다정한 TSA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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바라지 않았는데 오고야 만 그날. 한국 가는 날. 한국은 좋지만 혼자 있는게 싫다. 그동안 너무 행복했던게 실감 났지만 그런 기분 모른척하며 아침부터 애호박 전을 부쳐먹었다. 꿋꿋이 한식 해 먹은 내 끈기 칭찬해.. 토스트랑 스크램블과 퓨어리프티 이것저것 먹다 보니 나갈 시간 돼서 노루랑 우버 타고 이동했다.
일부러 일찍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문 연 카페가 없어 당황스러웠다. 너무 일찍 왔나. 그런데 공항 직원이 혹시 체류시간 많냐고 하더니 호텔라운지로 가는 길을 알려줘서 고마웠다. 와보니 알겠는게 이건 체류시간이 길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곳이긴 하다 싶을 정도로 조금 멀고 가는 길이 구불구불했다. 그렇지만 일찍부터 운영해서 매우 좋았다.
세상에서 가장 작은 스타벅스는 이 라운지에 있는 곳이 아닐까? 아주 작고 귀여운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주문하는데 고르는 것마다 안되고 음료는 그냥 맹물이라 작은 스벅 체험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단 것에 의미를 뒀다.. 게다가 너무 졸려서 소파가 푹신한 라운지에도 안 있고 복도 쪽 딱딱한 의자에 창가 보면서 있었다.. 지금 졸면 노루와 10초는 일찍 떨어지는게 되는 거니까..
그리고 한참 수다 떨고 쉬다가 비행기 타러 가는데 혼자 줄 서서 가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이 악물고 참았다. 정신 차리자. 그런데 내 앞의 유색인종.. 벨이 안 울렸는데도 한참을 수색하고, 바로 뒤에 있던 나에겐 가만히 있는데 가만있으라고, 줄 똑바로 서라고 계속 시비를 걸었다.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서 있었는데.. 이상하게 화가 나는 것보다 혼자라는게 실감이 나 눈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흘러나왔다.
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눈물을 흘려보내는데 몸이 너무 들썩였는지, 뒤에 있는 어린이가 내가 울고 있다고 부모님에게 이르고, 수색당하던 유색인종도 나를 보기 시작하니 방금까지 시비 걸었던 TSA가 한순간에 다정하게 변했다. 왜 우냐고, 뭔가 무섭냐고 묻는게 우습고 어이없었다. 다급하게 수색을 끝내고 다른 TSA들이 누군갈 불렀는데 대장 느낌의 TSA가 와서 무슨 일이냐며 물어봤다. 이 와중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 답도 제대로 못했더니 꼬옥 안고 휴지를 건네며 한참을 다독여 줬다.
다들 나를 둘러싸고 휴지를 한 뭉텅이씩 건네며 어쩔 줄 몰라하는데 누군가 시비를 건 TSA를 질책하는 걸 봤다. 저 사람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구나. 너는 오늘부터 사람이 아니다. 여튼 내 기억 속의 TSA는 완전 세고.. 피도 눈물도 없고 차갑고 냉정한 사람들이었는데 이걸 계기로 잊지 못할 일이 생기게 된다.
대장 TSA가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줘서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한 마디씩 입을 뗄 수 있었는데, 그분께 저기 내 가족이 있다고 했다.
TSA: 그렇구나 마음이 안 좋겠다.. 너 어디로 가는데?
나: 나는 IAD.. 워싱턴..
TSA: 그렇구나..
나: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우스 코리아에 가..
TSA: 뭐?? 너 진짜 슬프겠다. 너 가족 아직 저기에 있어?
나: 모르겠어..
TSA: 보고 싶어?
나: 응..
TSA: 짐 챙겨
그리곤 재빠르게 내 짐을 챙기게 해 주더니 어딘가로 데려갔다. 급하게 짐 챙기느라 한품에 다 욱여넣고 따라가니 잠깐 멈춰서 재정비하고 가자고, 옷도 입고 가방도 메고 가자고 하셨다. 그리고 노루에게 전화하라고 해서 어느 구역으로 오라고 하셨는데.. 설마.. 설마..
설마는 사람을 잡는다. 적어도 이 순간엔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. 노란 선이 그어진 곳엔 노루가 있었다. 입/출국을 나누는 선 같았다. 그곳에서 TSA의 주도 하에 서로 노란 선을 넘지 않게 발을 맞춰서 안게 해 주었다. 자꾸 키스하라고 했는데 그건 차마 하지 못했다. 마지막까지 휴지 챙겨주고 노루와의 포옹이 끝난 뒤 이분도 나를 꽈악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.
TSA: 인사는 잘했어? 괜찮아. 넌 할 수 있어 스위티.. 미국에서 한국까지 혼자 가는 것만으로도 넌 뭐든 해낼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고 모두가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어..
라며 진한 용기를 주고 가신 분. 감동에 휩쓸려 이름을 못 여쭤본게 아쉽다. 금발에 옅은 초록색 눈동자, 당신을 절대 잊지 않을게요. 저는 마지막 인사가 부족했던 건가 봐요.
덕분에 완벽하게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어서 그 이후론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. 달래주니 더 눈물이 났다고 변명이라도 할걸.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오랜만에 마음 놓고 울어본 것 같다. 무서운 줄로만 알았던 TSA는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. 처음 올 때와 같이 설렘으로 가득한 공항이 될 수 있게 해 줘서 감사드려요.
이제부턴 다시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. 비행기에 타면 크랜베리 주스 한 잔 시원하게 들이켜야지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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